"이제 여직원들과 일 못하겠네" 미투에 삐딱한 한국사회 민낯

2018. 3. 9.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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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꽃뱀론·음모론' 제기
일부 언론은 피해자 선정적 보도
여성 배제하려는 '펜스룰' 부각도

전문가들 "전사회적 반성 필요
동등한 인격체 인식 뿌리내려야"

[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거센 ‘#미투’ 물살에 씻겨 성폭력에 둔감했던 한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한편에선 위기감을 드러내며 이를 거스르려는 움직임 또한 격렬해지고 있다. 용기를 낸 피해 고백마저 ‘꽃뱀론’ ‘음모론’ 등으로 폄훼하거나, ‘펜스룰’을 내세우며 여성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미투의 기회를 성평등 구조의 강화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낡은 가치관의 역행에 편승하기보다, 공고한 성차별 관행을 깨려는 성찰과 노력을 전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투의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왜곡하는 시도는 미투마저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7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의 오찬 자리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의혹에 대해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기획했다는 얘기가 돈다”고 ‘음모론’을 띄웠다. 같은 당의 성폭력근절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박순자 의원도 8일 “우리에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터치’(접촉)나 술자리 합석에서 있었던 일들이었지 하룻밤 지내고 이런 일들은 없었다”고 말했다. 미투 폭로 대상이 된 여당 쪽을 공격하기 위해 미투의 의미를 비틀거나, ‘강간’만을 성폭력이라 인정하는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를 구사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투에 지지 의사를 밝혀온 여당도 ‘2차 가해’ 혐의를 피해 가긴 어렵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의혹이 폭로되자 같은 당 윤주원 부산시의원 예비후보는 트위터에 “달라는 ×이나 주는 ×이나 똑같다”는 글을 올렸다가 당에서 제명 처리됐다. 민주당 전북도당의 한 당직자도 6일 페이스북에 “알 듯 모를 듯 성상납 한 것 아니냐”고 글을 올린 사실이 알려져 사직서를 냈다.

미투를 다룬 언론 보도도 ‘피해자 보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 6일 <엠비엔>(MBN)은 안 전 지사 사건을 보도하면서 “김지은씨는 안희정 전 지사의 열혈팬이었습니다”라고 보도했다. 피해 사실과는 무관하게 피해자의 ‘전력’에 집중한 것이다. 명백한 성폭력을 ‘(가해자의) 나쁜 손’, ‘성추문’ 등으로 묘사하면서 피해 사실을 축소할 우려가 있는 표현을 쓴 경우도 발견됐다. 정슬아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클릭 수를 높이기 위해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분명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투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회식 등 모임에서 여성과 섞이지 않겠다는 남성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성 직장인 이아무개(30)씨는 “이제 여자 직원들과는 말도 못하겠다”는 푸념을 자주 늘어놓는다. 이씨는 “미투 당할까 두려운 탓에 아예 여성과는 접촉을 최소화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성들 사이에 성폭력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대안으로 거론되는 ‘펜스룰’도 실제로는 미투에 역행하는 움직임이다. ‘펜스룰’이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2002년 인터뷰에서 언급한 규칙으로, ‘아내 외의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미국에서는 성차별·성폭력이 일어나면 개인은 해고를 당하고, 회사는 수십억원 수준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담한다”며 “한국은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매우 미약한데 벌써부터 ‘펜스룰’이 언급되는 행태 자체가 황당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회원들이 8일 오후 서울 명동거리에서 미투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행진을 마친 뒤 부조상 앞에 장미를 놓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실제 펜스룰이 극단적으로 작용하면 오히려 여성 해고나 격리 등 성차별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페이스북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서 한 국회 비서진은 “오늘 의원님이 ‘요즘 주변에서 여직원들 전부 자르고 남자들로만 고용하라 그런다’고 웃으며 농담(?)을 하셨다”는 글을 올렸다.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대표는 “(펜스룰을 통해) 여성을 일상에서 배제하겠다는 것은 결국 현재의 성차별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것으로, 미투 운동에 대한 최악의 반응”이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만이 아닌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는 “미투 고백으로 ‘성차별적인 문화를 바꾸자’고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가해자에 대한 사법 처리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미투에 참여한 공익제보자들이 다시 자신의 일터에서 굳건하게 일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금비 최민영 송경화 박준용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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