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을 통해 만나는 우리 안의 문제

2018.06.24 21:15 입력 2018.06.24 21:26 수정

미국 유학 시절 만난 친구 중 한 명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출신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전까지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역사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친구는 도서관 컴퓨터로 자신의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죽어가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나는 무지와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었다. 제국의 심장에서 적대세력들과 대면해야 했던 그에게 일상은 전쟁터였다. 남아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걱정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분노했으며, 양국 정부로부터 검열당하고 있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계층적 특권으로 자신만 ‘안전한’ 공간에서 ‘한가롭게’ 공부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정동칼럼]난민을 통해 만나는 우리 안의 문제

팔레스타인 출신 무슬림 여성은 인종과 국적, 종교, 젠더 질서가 만들어내는 교차적 억압 체계에서 또 다른 위험과 마주해야 했다. 강의실에서, 교정에서, 동네에서 편견과 선입견에 가득 찬 백인 남성들의 시선과 희롱을 견뎌야 했고, 여행이 자유롭지 못해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학회에는 참석할 꿈도 꾸지 못했으며, 한 학기마다 도래하는 비자 심사에 불안해했다. 옷차림과 음식에 늘 신경을 썼으며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남성들의 성차별적인 행태를 증오하면서도 운명 공동체로서 연민하는 자기분열에 힘들어했다.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장소에서 마주하는 차별적 현실과 외롭게 쟁투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언젠가는 돌아갈지도 모를 ‘집’을 향한 양가적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거대한 분리 장벽에 둘러싸여 한 번도 바다 구경을 못했던 친구는 한국 식당에서 펄떡이며 올라온 회와 반찬으로 나온 멸치 볶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맛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잔인하다며. 식탁에 올라 누군가의 먹잇감이 되고 있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너무나 어린 시절-친구는 멸치가 ‘아기’ 물고기라 생각했다-포획되어 살해된 존재가 자신과 닮았다고. 그의 눈물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에 대한 질문이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 파괴한다. 부상이나 폭행, 고문, 강간, 살해를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의 모든 것들이 뜯겨 나가고 소중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 중 물적 자원이 있거나 해외에 후원할 가족체계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쉽게 다른 공간으로 이주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난민선에 오르고 언제 도달할지 모를 낯선 땅을 향해 긴 항해를 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한, 대부분은 이국 땅 난민 수용소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영구임시’ 상태에 놓인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니라 유발-데이비스가 적절히 지적했듯, 난민들은 그 어떤 새로운 삶이 아무리 오랜 세월을 거쳐 구성된다 하더라도 이전의 삶과 정체성이 갖고 있던 합법적 신분을 대신하진 못하는 영구적 ‘외부인’으로 남게 된다. 물론 내 친구의 경험처럼 전쟁과 이주는 젠더화되어 있고 계층화되어 있다. 전쟁의 참여와 수행, 피해의 내용과 정도뿐 아니라, 떠날 수 있는 역량과 임시 거주지 내 안전, 새롭게 정착한 사회의 제한된 물적 자원 또한 젠더 질서와 계층 질서를 통해 재분배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친구의 사정은 제주도에 난민 신청을 한 분들의 처지와 겹친다. 여기서 관련 온라인 논쟁들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맥락이 탈락된 논의는 확증편향의 감각으로 발화자들을 낙인찍고 편집되어 재활용되면서 다른 시공간에서 응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환기해야 할 점은 어떻게 억압받는 집단으로서 타자가 (재)생산되는지의 문제다. 억압받는 집단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도, 내재적 속성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 여겼던 일상의 실천, 불의한 사건, 부정의한 제도의 축적을 통해 생산된다. 만약 누군가 문제제기했을 때 당황하고 화를 낸다면, 당신은 무지해도 될 만큼 상대적 기득권층이다. 젠더 권력관계로 보면 나는 집단 남성의 상대적 약자이나, 계층 간 위계질서에선 강자일 수 있다. 인종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인종차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적 지위는 불평등한 토대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교차성은 내 문제가 가장 크다는 맹목적 주장이 아니라, 상대적 약자와 강자를 만들어내는 중층적 억압체계에 대한 예민한 인식이자 맞서 싸우는 실천의 힘이다.

이번 ‘예멘 난민 사태’는 우리가 너무 자연스러워 누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또 다른 특혜, 권력에 편승한다고 느낄 필요조차 없었던 내부의 특권을 깊숙이 겨눈다. 다양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로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팔레스타인 친구는 지금, 포성이 울리는 가자지구에서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